두 도시 이야기 (찰스 디킨스)
출판사: 비꽃
지금까지 읽었던 책 중에서 ‘1984’만이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책을 읽은 후에는 남들에게 추천할 만한 책이 한 개 더 생긴 것 같아서 그런 건지 책을 통해 느낀 건지는 몰라도 희열감을 느꼈다.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하는 책이기도 했다. 초반에 독백인 부분이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가 프랑스와 영국 등의 세계사를 자세히 몰라서 저자가 의미한 바를 완벽하게 받아들이지도 못한 것 같았다. 마지막에 있는 연도표를 가지고 비교해가면서 책의 내용을 곱씹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세계사를 알고 있었다면 읽는 동안 더 새로운 감명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다음에 한 번 더 읽을 것을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처음에 읽을 때는 대부분 큰 뼈대를 알아가는 느낌이다. 아무리 책 설명을 읽어서 어떤 특정한 책을 읽는 흥미가 생긴다고 해도 읽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를 제외하고 두세 번 읽을 때는 그때부터 내가 놓친 부분을 바로 잡고 그 당시의 나의 상황, 생각 등 자신에 따라 느낌점이 달라지는 재미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시각에서 책을 새롭게 볼 수 있기도 하다.
첫 번째에 이렇게 큰 감흥을 준 책이 ‘1984’이후로 처음이었다. 이제는 그 책이 결말이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아무래도 모든 부분에서 가 아니라 그 주제와 특정한 부분에서 인상적이었다고 기억하는 것이었다. ‘두 도시 이야기’는 어떻게 내 기억에 남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읽던 당시에는 흡입력이 굉장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내가 어떤 입장에 들어가 있기 보다는 전지적 참견 시점, 즉 제 3자의 시선으로 책을 본다고 항상 느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감정을 공감하는 데 있어서 작가의 도움인지, 내가 바뀐 것인지는 몰라도 내가 주인공이라고 믿는 마네뜨 가족에 대해서 강한 동정심을 느끼고 그들이 정말 행복했으면 하고 진심으로 바랬다. 그들이 어떤 곤경을 겪을 때 한 마음으로 걱정하고 응원하는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책의 전개가 어느 부분부터는 상당히 박진감 넘치다 보니 한 번 읽으면 빠져나오기가 힘들었고, 너무 집중을 하다 보니 내 기력이 빨려 나가는 느낌이었다. 중간 중간 큰 일이 있으면 그런 사건들을 마주할 힘이 없어서 조금 쉬다가 다시 책을 읽어야 할 판이었다. 정말 매력있고, 나도 그 혁명의 순간 속에 함께한 느낌을 준 정말 인상적인 책이었다.
이제부터는 조금 더 나아가 책의 내용을 더욱 깊게 생각해 볼까 한다. 앞서 언급한 바 있듯 이 책은 프랑스 혁명을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 그러면서 영국과 프랑스를 비교하고 있는 느낌도 주었는데 이 부분에 관해서는 내가 세계사를 자세히 모르고 이 사건 자체도 잘 모르기 때문에 읽을 때 별로 특별한 감흥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내가 짚고 싶은 부분은 좀 더 명확하지 않은 내용에 있다. 나는 복수와 용서라는 주제를 떠올렸다. 혁명은 나쁘게 말해, 혹은 조금 더 궁극적인 목표가 복수에 있다고 생각한다. 멋있게 말해서 혁명인 것이지 결국엔 다른 시대 상황보다 더 많은 목숨이 짧은 시간안에 정의라는 혁명군들만의 목표로 앗아지는 결과를 낳는 시대이다. 상황이 상당히 불안정하다는 느낌은 책의 초반부터 이미 느껴온 바이다. 그리고 책 설명에서도 보았고, 어린 평민아이가 귀족의 마차로 인해 목숨을 잃는 사건을 꽤 심도 있게 비추는 작가를 보고 어떤 일이 곧 이뤄지겠구나 하고 예측할 수 있었다. 이런 불안정한 상황과 대비하여 다른 영국으로 이주한 프랑스인인 마네뜨 집안을, 그 집안의 평화롭고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폭풍전야’라는 인상을 확 주었다. 그러면서 나는 읽으면서 알아채지 못했지만, 그 집안에서도 메아리니 발걸음이니 하면서 민중의 혁명을 암시했다는 옮긴이의 설명을 보고 꽤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이런 누군가의 행복한 삶을, 혹은 누군가의 끔찍했던 삶을 바꾸는 계기로서 혁명이 작용하게 되는 모습이, 나는 어떤 편에 서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죄 없이 열심히 가정을 꾸리고 삶을 영위해 나가는 다 똑같은 인간들에게 평민이라는 계급, 딸랑 그거 하나를 가졌다고 해서 그들의 가치에 맞지 않는 대우를 받게 되는 모습에 나도 덩달아 울분이 터지기도 하면서 처음에는 혁명을 합리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죄 없는 사람들을, 그들만의 정의로써 판단하여 선량한 자들의 목숨까지 앗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은 누구를 위한 움직임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혁명을 앞장섬으로써 기존 권력을 깨뜨리고 다시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기존의 권력층처럼 자신들의 힘을 남용하는 모습을 보면서 성악설을 떠올리기도 했다. 결국에는 권력이라는, 자신이 누군가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갖는 순간 사람들이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다는 상상을 (진실이 될 수도 있는) 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동물적인 모습, 서로를 죽이는 모습을 보면서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니 이제는 누가 혁명군이고 누가 기존 권력층인지, 누가 선한 사람이고 누가 나쁜 사람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결국에는 자신에게 누군가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힘이 주어지면 다들 같은 결정을 하는 모습을 보고 이건 인간의 본성인지, 혹은 그들의 인생에 공통점이 있고 그 점이 이런 결정을 함에 있어서 영향을 미친 것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아마 권력을 갖고 도덕적인 마음가짐을 기반으로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는 교육을 못 받아서 인지도 모른다고, 그럴 거라고 믿고 싶기도 했다. 시작은 평민들의 권리를 높이고 사람다운 삶을 위함이라는 목적으로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단두대를 만들어 처형이라는 걸 하기 시작함으로써 사람들이 피에 미쳐 발광난 동물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조차도 혼란스러웠다. 처음에는 부패한 기존 권력에 용맹하게 맞서는 혁명군들을 보면서 이런 사람들이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간다고 하며 마음속에서 웅장함을 느끼고 그들을 존경 가득한 눈으로 보았는데, 뒤로 갈수록 내가 했던 생각에 대해서 계속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역사를 써 나가지만, 그게 긍정적인 이야기가 될지는 스스로에게 물어도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점점 갈수록 정의라는 이름이 결국에는 개인의 복수를 품고 계획했다는 걸 깨닫자, 이제는 더이상 혁명이라는 존경심이 가득한 이름을 붙여야 하는지에 관해 깊게 생각하게 될 정도였다. 또한 이것이 복수와 용서에 관해 고민하게 된 계기가 되어주었다. 내가 본 관점으로는 프랑스 혁명보다는 개인의 복수를 위해 시작한 혁명과, 그에 반해 한 때는 복수를 갈망해지만 결국에는 용서하고 자신보다 아끼는 딸을 위해 자신의 원수의 혈통을 사위로 받아들인 마네뜨 박사의 모습이 대조되어 보였다. 개인직인 복수의 감정이 있다는 공통점이 나를 통해 그들을 비교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복수보다도 그것보다 더 사랑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 복수를 스스로는 감당하고 이겨내지는 못해도, 그런 사람이 있으면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박사가 보여주기도 하였다. 복수는 결국 선을 넘어서 모두를 망치는 길이 될 것이라는 걸, 이제는 어쩌면 클리셰가 되어버린지도 모르겠다. 모든 책, 내가 본 모든 인생에서 항상 진리와 같이 나오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책이 나에게 성악설의 모습을 더욱 보여준 듯하다. 솔직하게는 성선설을 조금 더 믿고 사는 나로서는 혁명의 장면 장면들이 상당히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전에 접했던 정보나 이야기와는 어떻게 다른 지는 모르겠지만, 이전까지의 매체들이 나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면 이 책은 나의 신념을 흔들어 놓았다. 애초에 확고한 믿음은 아니었으나, 퍼센트로 보이자면 60대 40정도 (성선설을 믿는 마음이 60)였던 것을 반대로, 성선선을 믿는 마음을 40%로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정말 선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은 나쁘되, 다른 사람들로부터 태어나자 받은 사랑으로 인해 달라진 게 아닌가 라는 새로운 나만의 이론을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한 번 이 주제에 매료된 이상 지금으로서는 빠져나오기가 어렵다. 계속 같은 생각이 반복될 뿐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읽으면 분명 겹치지 않을지도 모르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고, 다른 부분에 관심을, 혹은 집중을,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